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낯선 감각으로 살던 그간의 보름 남짓한 마우어의 여정을 긴 삶으로 엮어본다.
북유럽에 온 이유는 단 두 가지이다. 이곳은 나에게 완전히 낯선 곳이고, 무르익어 가는 완전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기내에서 상공을 빼곡히 뒤덮은 구름을 보았다. 비행기는 이 거대한 구름 이불을 뚫고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착륙 시점이 다가오니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길고 나지막한 한숨이 나왔다. 잿빛 풍경을 수묵의 세련된 분위기로 느낄 줄 아는 어른이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스러운 질서, 간결히 오가는 인사, 소박한 규모의 공항은 스톡홀름의 단정한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흐린 하늘은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시내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걸까.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색색이 오래된 건물, 넘실거리는 나무, 그 길을 천천히 달리는 운전기사. 이모든것들이 나를 아늑하게만들었다. 마치여기에서는전혀서두를것도, 빨리무엇을이루어야할것도 더는 없을것같은 기분이었다.
'한국에서의모든 수고스러웠던일은 잠시 잊어버려. 누구도인생을재촉하지않을거야.'
마음속으로생각했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이방인의 몸과 마음을 미리 단련이라도 시켜주려는 건지, 이 나라의 계절은 지독히도 변덕스러웠다. 구름 이불이 덮이면 알싸한 봄이었고 스르륵 지나가면 반짝 여름이었다.
잠시라도 파란 여름색 하늘이 보이면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양 볼에 힘껏 바람을 넣어 연신 입바람을 불었다. 잿빛 구름 이불에 저항하고 싶었다. 그렇게 두 계절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괜찮은 식재료의 단순한 조합만으로 그 마음이 다 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이 한 접시가 피로를 이기는 가장 맛있는 조합이었다.
곡물 빵과 터키 햄, 스웨디시 치즈를 툭툭 올려 한 입 베어 물고 오물오물. 그럼 빈틈없이 행복해진다. 단, 빵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야 한다. 세 가지 재료의 맛을 하나씩 모두 느끼려면.
하루는 다른 치즈를 골라 보았다. 구멍이숭숭뚫린 조금 더 강력한 스웨디시치즈였다. 그 꼬릿하고담백한맛은 입안을 타고 실실웃음마저 새어 나오게 했다. 내 몸에 남은 긴장감까지 여과 없이 숭숭 뚫리고 풀리는 기분이랄까. 이 맛을 골고루 오래 기억하고 싶어 계속 오물거렸다.
모국어로부터격리된 일상 속에서느끼는고요와안식이 있다. 나는 그저 이들의 대화가 구불구불하게 들릴 뿐이다. 오늘도 조용히, 또렷이 내 안의 생각을 이어가며 하루를 보낸다.
얼마전, 번역가 정수윤 씨와 작가 김하나 씨의글이 담긴 책 한 권을읽다가다음과같은구절을만났다.
'세상모든일이일정부분은매일조금씩쉬지않고꼬박꼬박무심하게앞으로나아가는힘을요구한다.'
- 정수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필요하지만 나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일도 필요하다. 나를 계속 열어 두는 연습을 한다. 내가 세상을 궁금해하는 만큼 세상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서 점점 조개가 되어 간다 할지라도 의식적으로 자주 입을 벌려 세상과 호흡하고 싶다.'
- 김하나
숍 마우어의 첫 번째 챕터를 종료하고, 나는 전에 없던 여유를 찾았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때때로 마음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조금씩,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작은 진주를 품은 유연한 조개가 되어가는 과정이면 좋겠다고.
강보송 작가님(이하 *보송)을 만났다. 마우어의 스톡홀름 라이프를 실현해 주신 분이다.
보송은손뜨개(Knitting) 인형부터직조(Weaving)에이르기까지 텍스타일 분야에 폭 넓은작업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전통 직조를 배우며 심화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 년 전, 마우어의 여름 전시로 처음 만난 보송은 이름만큼 참 따뜻하고 '보송'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난 사이인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대에게 살갑고 다정했다. 나는 보송의 생글거리는 미소와 활력이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삶에 작은 씨앗을 심고, 2년이 지나 스톡홀름에서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초여름 기운이 완연한 날, 보송이 다니고 있는 직조 학교를 보여 주겠다고 해 따라나섰다. 차분한 민트색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데 이미 마음 한 켠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햇살을 듬뿍 머금은 주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온기가 가득했다. 저 멀리 보이는 달콤한 분홍색 벽은 뭐지. 그 앞에 천장 조명은 또 어쩌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요소가 두 눈에 차오르고 있었다. 불쑥불쑥 일렁이는 마음을 붙들고 보송에게 거듭 물었다.
여기가.. 정말 학교가 맞아요?
스웨덴의 어느 안락한 가정집에 온 것 같았다.
이 학교 안에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여러 세월이 담긴 물건들이 있다. 예를 들면 노르스름한 흰색을 띠는 부엌 상부장과 하부장, 성실하게 이어 붙인 타일, 그리고 아주 오래된 모델의 식기 세척기가 있다. 그 옆으로는 빛바랜 색이 담긴 책상과 짙은 감귤색 의자가 나란히 있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의 피카(Fika: 커피와 함께하는 휴식 시간)를 위한 장소라고 한다. 책상 위로 올려진 귀여운 촛대와 작은 식물들은 마치 그들이 둘러앉아 나누던 정다운 이야기의 자욱 같았다.
단단한 손놀림으로 직조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다'. 덴마크에서 온 보송의 학교 친구다.
이다는 이제 막 스톡홀름에 도착한 나에게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런데 대답하는 나의 눈이 자꾸 타원을 그린다. 이다의 순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조물조물 땋은 금발 머리에 살랑이는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꼭 동화 속 캐릭터를 떠올리게 했다.
나긋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보송과 이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이 생경한 공간 구석구석을 조금이라도 더 프레임에 담고 싶었다.
좋은 공간이란 어떤 것일까. 슬며시 생각해본다.
나에게 있어 좋은 공간이란 '성장형 공간'이다. 세련된 가구, 값비싼 도구와 설비 등 좋은 것으로 잘 갖추어져 사람들만 들어오면되는 완성형 공간이아닌, 그들과 함께자라나는공간.
보송의 학교가 내게는 그러했다. 손 때 묻은 직조 기계, 세월을 보낸 가구와 물건들 사이로 이들의 시간이 꿋꿋히 자라나고 있었다. '학교'의 일반적인 문법을 깬 학교였다. 자연스럽고 또 자유로웠다. 보송이 이 근사한 학교의 첫 한국인 학생이라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조용한 펍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송과의 밀도 높은 시간으로 우린 전보다 더욱 친해져 있었다.
문득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굉장히 신비롭다고 느껴졌다. 인연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관계를 이어가는 평범함도 이곳에 오니 새로운 감각이 된다.
스톡홀름의 하얀 밤을 거닐며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보송은 예정대로 다음날 욀란드(Öland-스웨덴 남동부에 위치한 섬)로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곳에 있는 옛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나의 스톡홀름 선생님의 마지막 배웅길은 조금 아쉽고 외롭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