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물의 도시, 스톡홀름. 그중 나는 '유르고든(Djurgården)'이라는 섬의 남쪽에 살고 있다.
유르고든 섬에는 스웨덴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기념관과 미술관이 있다. 요트가 정박한 항구, 고급 주택가, 테마파크가 있고 무엇보다 광활한 숲과 초원이 있다. 시내 중심가와 다소 떨어져 있지만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 덕에 섬의 하루는 매일 분주히 흐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번도 소란스럽거나 어지러운 적이 없다.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롭다. 대체 이유가 뭘까.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바람이 불면 커다란 물결이 되어 흔들리는 나무, 짙은 신록이 가득한 숲. 지형의 반 이상이 자연으로 둘려있어 손안에 온통 초록을 거머쥔 기분이다.
결국 유르고든이 품은 푸른 기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도 이 초록 안에서 점점 투명해지고 옅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 섬과 도시가 주는 자연의 너그러움은 매일 운동화를챙겨신고 나를 긴산책에 나서게 한다. 시내로 가는 버스와 트램이 원활히 다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걷고 있다. 날마다 스치는 호수는 어느새 이웃집 담장처럼 느껴진다.
사는 동안 이 풍경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씩씩한 다짐을 지켜가는 중이다.
그간 먹은 빵, 달걀, 햄, 감자 요리에서 벗어나 오늘 새로운 맛에 도전한다. 보송이 남기고 간 소스로 파스타를 해 먹는 날이다. 사실 요리라고 하기엔 몹시 초라하지만 여행지의 부엌에서는 이조차도 설레는 일이다.
새로운 요리는 새로운 식욕을 낳는 법. 푸실리 면을 삶아 팬에 옮겨 볶고 간을 보는데 눈이 말똥해진다. 그 자리에 서서 포크를 바쁘게 오갔다. 이른 아침부터 살찌는 밀가루 음식을 먹인 내 몸에게는 미안하지만... 몸은 과연 알까? 내 행복도 같이 살찌고 있다는 것을.
아침상을 치우고 오전 여가를 보내고 있으면 곧 우렁찬 아이들의 비명이 들린다.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테마파크인 '그뢰나 룬드(Gröna Lund)'가 바로 집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뢰나 룬드는 매일 아침 열한 시에 개장한다. 덕분에 매일 아침 나의 열한 시는 가장 경쾌하고 명랑한 소리로 채워진다. 말소리가 아닌, 웃음소리로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다.
구름 사이로 조각난 햇살이 눈부신 북구의 여름. 긴여행의마지막 하루를 남긴 사람처럼목적없이 걷고 서기를 반복한다. 1.5배 느린 걸음으로 1.5배 높은 물가를 체감한다. 궁상과 낭만 사이를 오가며, 틈틈이 좋은 기분을 저장해 가며.
감라스탄(Gamla stan: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스웨덴어로 '옛 도시'를 뜻한다)의 한 좁은 골목을 지날 때였다. 어디선가 느슨하고 그윽한 빛이 느껴졌다. 그 빛은 오래된 나무의 냄새까지 함께 실어 오고 있었다. 골동품 상점이었다.
여느 나라의 골동품 가게가 그러하듯, 호기심을 자극하는 옛 물건들로 빠짐없이 빼곡했다. 그 틈에 도톰한 나무로 만들어진 둥근 손거울을 하나 보았다. 선반 위에 덩그러니 놓인 모습이 다른 물건들과는 조금 달랐다. 초여름 그늘처럼 어딘가 느긋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가만히 손을 뻗어 거울의 난 오래된 상처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닿은 지난 시간이 매만질수록 윤이 났다. 살필수록 정감이 가고 아름다웠다.
도심 곳곳이 사탕을 흩뿌린 듯한들꽃으로 가득하다. 거리에도, 공원에도, 누군가의 안뜰에도 여리고 힘찬 생명이 살아 숨 쉰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향기와 소리가 부풀어 오른다. 사실 나에게는 들꽃이지만 모두 소중한 이름을 가진 꽃일 테지. 하지만 그 이름을 모두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 계절에 어울리는 것을 보며 지금처럼 알록달록하게 살고 싶다.
마음에 오래 남는 어른들의 모습이 있다. 나에게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그렇다. 의지보다는 관조가 넘치는 선한 눈빛의 사람들. 그 뒤로 다정함과 여유로움이 흐른다. 어김없이 인생의 물음 하나가 따라온다.
그들은 어떤 세월을 살아왔을까.
다정함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이 뭘까.
오래전, 한 매체에서 서양인 노부부를 상대로 그들이 살아온 삶을 인터뷰하는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영상에서 인상적인 답을 만났다.
"사랑을 얻는 건 용기이지만 지키는 건 대화예요."
대화로 차곡히 빚은 시간이 하나둘 쌓여, 지금은 보이지 않는 삶의 어둠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오늘의 단단함에 이르렀을 것이다. 멀어져 가는 노부부의 고요한 걸음을 보며 나는 그날의 답을 되뇌었다. 문득 석양에 물드는 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아껴가며 지켜보았다.
저녁 여섯 시가 가까워져 오면, 스톡홀름 시내 대부분의 카페와 상점이 마감을 준비한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볕은 생생하다. 살랑이는 바람마저 좋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실 서쪽으로 저무는 해는 어서 집으로 가라는 듯 아까부터 나의 왼쪽 뺨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선크림을 아주 두둑이 발랐으니까. 그리고 설사 피부가 좀 타더라도 괜찮다. 검게 그을린 내 얼굴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테니까.
한국을 벗어나면 나는 꽤 즉흥적인 사람이 된다. 왔던 길로 다시 가지 않고, 매일 새롭고 낯선 방향을 찾아 기웃거리고 헤맨다. 호기심에 이끌려 지도 밖으로 성큼 나간다.
낯선 길을 걸으면 꼭 어린아이처럼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작고 사소한 일도 훨씬 기쁘게 다가온다. 그래서 지루할 겨를이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길을 따라 빙 둘러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니 제일 먼저 긴장이 풀린다. 뒤이어 발바닥,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뭉근히 저린다. 고단함이 당연히 따라올 것 같지만 예상외로 몸은 가뿐하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시선을 위로 두고 걸으면서, 평소 바닥을 자주 보던 나의 구부정한 자세가 자연스레 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통증은 오히려 줄어들고 선명한 개운함이 기본요금처럼 따라온다. 두루두루 장점이 많은 해외살이다.
스톡홀름 시내 어디를 가도 강아지를 산책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 모습이 흐뭇해 하루는 이들만 골똘히 살피는 날이 있었다. 공원에 엉거주춤 서 있거나 그들의 산책길을 어슬렁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 지하로 들어가는 강아지를 보았고 그날로 탐구를 멈추었다. 이렇게 많은 시설에서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 하나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부러움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이 등을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