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한 내 마음이 보이기라도 한 걸까, 어느날 지원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의 스톡홀름 생활을 보고 선뜻 먼저 연락을 준 것이다. 그의 온기 있는 인사가 무척 고맙고 반가웠다. 문장 너머로 짐작 가능한 다정한 마음이 조금씩 느껴진다. 문득 차가운 휴대폰 화면이 다정한 편지지로 보였다.
우리는 햇살이 터질 듯이 번지는 어느 늦은 오후에 만났다. 지원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첫 만남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간 서로 한국에서 해온 일, 스톡홀름에서의 삶과 둘레, 나아가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까지. 우리는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쉼 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원의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구김 없는 넉넉한 마음과 반짝이는 눈빛, 생글거리는 미소. 신기하게도 언뜻 보송의 얼굴이 스친다. 이번 여름 스톡홀름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어쩜 하나같이 모두 싱그럽고 아름다울까.
긴 여정의 끝자락에 이르면 어김없이 피어오르는 감정이 있다. 나는 그것을 넌지시 지원에게 나누었다.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그의 눈빛은 나도 모르는 사이 솔직한 속내를 내비치게 했다.
쓸쓸한 기류가 감돈 걸까, 지원은 차분하고 단단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북유럽에서 보낸 두 달은 애쓰지않아도 체에걸러진알맹이처럼남아 필요한때에쓰일거라고.
나는 생선 스튜 한 그릇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지원의 말을 오래 곱씹으며 천천히 소화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세 시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기분을 맛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지않아 다시 만날 다음을 기약하며.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긴 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도심 속의 골목길이 아닌 유르고든 섬의 숲길을 한 바퀴 돈다. 자연을바라보기시작하면 단 일 분도허비하지 않을 수 있다.
6월 16일의 풍경
7월 29일의 풍경
해당화 열매가 붉게 익어가고, 숲을 거닐며 만났던 푸른 갈대는 노란 옷을 입었다. 어느새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이토록 짧은 여름이어서 그토록 소중한 것이겠지. 아름답고숭고하면서도덧없는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신기하게도 스톡홀름에 도착하고 이튿날 만났던 하늘을 마주했다. 잿빛 구름 사이로 빼꼼히 자리한 파란 하늘. 두 달 전 그날처럼 날씨는 여전히 변덕을 부린다. 하지만 구름을 물리치고 싶은 마음이 더는 없다. 양볼 힘껏바람을넣어 연신 입바람을 불어대던 나도 없다. 그저 흐르면 흐르는 대로,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여한없이 마음을 쓴 덕분일까. 때로 적당한 만족이 가장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 채우려 하지 말고,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끝까지 누리려 하지 말고, 적당한 부족을 남겨두는 것. 만족보다중요한적당한부족.
빵과 채소를 먹을 때 자주 곁들인 감자. 스웨덴 감자는 작지만 꽉 찬 속에 윤기가 나는 것이 꼭 알토란 같다. 감자 요리를 거의 매일 먹었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감자를 삶고 구웠다. 물 끓는소리, 수증기가올라오는연기를물끄러미바라보는 저녁이다.
스톡홀름에서의일상은한국에서와는또 다른감각을쌓아가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중간어디쯤 붕떠 있는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따금 찰나의 고독이 찾아올때면가족에게전화하고, 안부를전해주는친구들에게온기를얻고, 파이를 꺼내 읽었다.
페이퍼 파이(paper pie).
맛있는 파이(pie) 한 조각처럼 낯선 곳에서 만나는 새롭고 달콤한 시간, 겹겹이 쌓인 파이지처럼 생경한 경험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과정이었다. 마우어의 편지 한 조각이 파이를 나누어 먹는 기분으로 맛있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말했다. '매일 하는 일'이 가장 무섭고 위대하다고.
매일 하는 일, 매일 사용하는 것, 매일 먹는 음식이 나를 만드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파이를 향한 애틋함과 따뜻한 무게감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노트북 앞으로 불러들였다.
여행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에게는 공감이 되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는 설렘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엮고 싶었다. 호기롭게 내디딘 첫걸음에 바둥거리기도 했지만 그 모습마저 나로 인정하는 시간이었다. 성실하고 즐겁게 이어간 날들이었다.
어떤영역이든개인의공간 한켠에 시간을들여 무언가를 기록하고 남긴다는 것은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다양한 경로로 전해지는 관심과 응원이 벅차도록 좋았다. 눈가가 뜨거워지길 여러 번이었다. 편지 한 조각을 쌓아 올리는 것은 기록 그 이상의 일이었다.
구독자 목록을 천천히 모두 읽어보았다. 반갑고 낯선 이름들에 모두 한 번씩 눈이 머문다.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나는오늘 안도와 성찰 대신그들의 존중과 응원을 마음속에간직한다.
이작은 교류는 예상보다 훨씬 큰 소통을 안겨 주었다. 그 흔적이아랫목온기처럼은은하게남아 마우어가 나아갈 방향으로 천천히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이번 북유럽 여름 여정은 여기서 마무리하지만 '페이퍼 파이'는 다음 여정으로 계속 이어질 테니까.
Q. 북유럽 여정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Q. 북유럽에서 먹은 것 중가장맛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북유럽의여름이요.
2025년 7월 31일 목요일
스톡홀름으로부터
P.S.
저는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는 긴 비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스톡홀름 공항에서 마지막 파이를 마무리해요.
매주 목요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제 손으로 직접 '발송' 버튼을 누르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그 짜릿하고 긴장감 넘치는 설렘을 아쉽게도 이번에는 느끼지 못하겠네요. 마지막 파이는 시간 예약을 걸어두었습니다. 아마도 한국 시각 아침 열 시 정각에 이 편지를 받아 보실 거예요.
그동안 많은생각과다정한말들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보내주신 이미지와 문장은 빠짐없이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었어요. 고독이 찾아올 때면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저만의 소중한 꿀단지가 되어있더라고요. 두고두고 아껴가며 앞으로도 종종 꺼내 먹겠습니다.
대체로 모든 것이 처음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작은 소동을 일으킨 기분이었습니다. 서른 넘어떠나는가장긴여행이었고, 호기롭게시작한뉴스레터 서비스 역시처음이었거든요.
작은 비중이지만 주간연재 글을 쓴다는것은 쉽지 않더군요.글을쓰는것을직업으로삼는 분들의대단함을 느끼며, 그저 매일 조금씩 이어갔습니다. 용기를 준 사람들의 얼굴을 문득문득 떠올리면서요. 그러다 보니 조그맣던 마음이 어느새진심으로꾹뭉쳐져 큼지막하게 커져 있습니다. 부푼 마음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도 큰 숙제가 될 것 같습니다. 모쪼록 이 여름의 즐거운 소동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지켜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팔월의 폭염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날마다 들려오는 소식에 솔직히 조금 두렵습니다.
불볕더위와 싸워가며 고단함이 다시 반듯해질 때쯤 비로소 새로운 제품을 소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사이 두 번째 챕터도 차근히 고민하며 만들어 가보겠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잊지 않고 기다려 주세요. 언제나 그랬듯 오래된 물건이 주는 고요한 이야기를 전하고, 마우어다운 것을 더욱 사랑하고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