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 온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알싸했던 5월의 초여름 공기는 한여름의 꼿꼿한 기세로 바뀌어 날마다 한층 짙어지는 풍경을 만들어 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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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물 시장에서 만난 빛깔 좋은 식재료들. 꼼꼼히 채소를 고르시는 할머니 옆을 나도 기웃거린다. 빵을 주식으로 살아보니 싱싱한 야채를 곁들이는 일이 제법 당연해졌다. 익숙한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언제나 힘이 된다. 매콤한 김치찌개가 조금은(많이) 그립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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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분수 광장, 보송과 함께 맥주를 마신 펍, 마라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거리. 스톡홀름에 도착하고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닌 곳들이다. 온통 새로움으로 가득해 삶의 의지를 샘솟게 했던 그 길을 다시 거닐었다. 여행자의 발자취는 진한 자국으로 남아 생활자의 익숙한 반경이 되어 있었다. 동경의 시선을 한 꺼풀 벗겨내니 그저 반짝이는 것이 아닌 뭉근하고 편안한 빛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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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짝사랑을 위해 유르고든(Djurgården) 섬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좋아하지만, 어쩌면 다음 스톡홀름에서는 이 섬에서 머물 수 없을지 모른다. 아마도 머물지 못할 것이다. 지역 특성상 여행객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흔한 호텔도 비앤비도 없다. 그저 흐르는 곳일 뿐 머무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섬, 그래서 이곳에서 지내는 지금의 기회가 드물고 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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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면 나를 기다릴 크고 작은 일이 몇 가지 있다. 자세히 알지 못해 조금 궁금하다. 하지만 우선은 거기까지다. 아직 내 마음의 저울이 한국에 닿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머지않아 이 도시와 작별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더 짓누른다. 나는 이렇게 애틋한데 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하게 흐르는 하루가 괜히 서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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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우거지고 푸른 잎이 한들거리는 북반구의 여름. 초록이 내는 맑고 청명한 소리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 구매한 물건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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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선율이 흐르는 소리 상자다. 움직임이 감지되면 모션 센서가 작동해 청아한 새소리가 조금씩 울려 퍼진다. 그렇게 2분간 은은하게 주변 공기를 채우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가만히 앉아 파이를 쌓아가며 듣는 저녁의 새소리가 좋다. 방 안에서 누리는 생생한 자연!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잠시 멈추고 싶다. 세상의 속도와 별개로 나만의 속도로 지키고 싶은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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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에 담긴 사진을 쭉 넘기며 이 도시를 향한 단어를 세 가지로 정의해 본다.
자유, 여유, 향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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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정답게 놀아주는 어른들.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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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사람과 마냥 새롭고 신기한 사람. 사뭇 다른 이들이 함께하며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배우는 것.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녀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채우고, 손녀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인생을 배운다. 그렇게 같은 하루를 지내며 삶의 온도와 농도를 중간으로 맞춰 가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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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친숙한 글을 쓰고 싶어 좋은 표현이나 단어,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문장 등을 써두는 메모장이 있다. 글을 쓰다가 멍해지면 종종 그 메모장을 꺼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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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지난 늦은 밤, 잘 준비를 마쳤지만 연신 하품을 이어가며 메모장을 뒤적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래전 기록해 둔 이지윤 교수님의 '눈동자 이론'이 보인다. 이 메모를 보자 조금 전에 겪은 일이 번뜩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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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이 레터를 쌓아가며 종종 다정한 메시지를 받는데, 최근 어느 중국인의 고마운 관심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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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에서의 생활을 담은 사진을 잘 보고 있다는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성수동 숍 마우어에도 다녀간 적이 있다는 반가움도 전한다. 고마운 마음에 얼른 답하려는데 느닷없는 질문 하나가 대뜸 날아온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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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활하고 아득한 질문에 나의 손과 눈은 갑자기 길을 잃고 말았다. 가벼운 감사 인사로 마무리하려던 계획과 다르게 집요한 물음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럴 땐 정말이지 부끄럽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마음은 더없이 고마웠지만 어쩐지 바로 반응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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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몇 년 전, 아트 큐레이터 이지윤 교수님의 공간을 소개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지윤 교수는 현대 미술을 교류하는 큐레이터이자 한국의 문화 예술을 굵직하게 이끄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알고리즘에 이지윤 교수의 이야기가 뜨면 빠짐없이 챙겨 볼 정도로 나는 그의 우아한 말투와 기품, 예술적 능력, 관록을 좋아한다. 아주 오랜만에 그의 영상을 다시 찾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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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공간, 지식, 라이프 스타일 등 삶의 여러 분야를 탐구하고 더 나아가 취향과 지혜를 소개하는 어느 아나운서의 채널 속 한 콘텐츠에 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교수의 작업실을 가득 채운 미술품 소개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대화와 인테리어 팁이 짤막하게 오간다. 오래된 빌라 속 빼곡하지만 유연하게 자리한 작품과 기물에 진행자의 감탄이 흐른다. 어떻게 이런 조화로운 감각으로 물건을 고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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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지윤 교수는 나지막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Retina Theory: 눈동자 이론'을 말한다. 좋은 것을 많이 보기 때문에 감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안목'이라는 말을 함께 곁들인다. '안(眼)'은 눈 안쪽으로 보는 것, '목(目)'은 통찰력을 뜻하는 것으로 사이트와 인사이트를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보았을 때 이쯤 놓아야겠다는 감이 자연스레 생기는 것. 그건 때로 직감을 따르는 순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말은 다시금 내 마음에 불쑥 들어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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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윤 교수의 눈동자 이론을 듣고 싶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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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멀리 바다 건너 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을 중국인에게 '눈동자 이론'을 빗대어 회신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나는 아직 부족하지만 좋은 것을 자주 보고 있다고, 경험을 위한 시간을 아끼지 않은 덕분인 것 같다고, 많이 감사하다고.
하지만 밤은 깊었고 나는 졸린 눈을 간신히 비비고 있었다. 길지 않은 몇 마디로 설명할 힘이 내게는 없다. 그렇지만 답은 서둘러야 했다. 짤막하지만 진한 고마움을 전하며 이모티콘을 대신해 미소를 남겼다. 그리고 힘겹게 눈동자를 굴리며 휴대폰을 덮었다. 폭포수가 물웅덩이를 만났으니 순탄하게 강으로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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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조금 특별한 옷이 있다. 오래전 친구 결혼식 축사 때 입은 리넨 셔츠다. 어깨에 자그마한 맞주름이 잡힌, 색 바랜 벽돌색 반소매 셔츠.
어느 보통날, 특별한 기분을 내고 싶을 때를 그리며 여행 가방에 챙긴 옷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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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애틋하지만 크게 별 볼 일은 없는 보통의 하루. 그래서 이곳에 와 처음으로 리넨 셔츠를 꺼내입었다. 내심 조금은 특별한 하루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로젠달 가든 (Rosendals Trädgård)을 향해 익숙한 걸음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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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고든 섬 안쪽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로젠달 가든은 과거 스톡홀름 왕실의 정원이었다. 지금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모든 시설을 자연 그대로의 방식으로 관리한다. 넓은 부지의 농원과 쉼터가 있고 식당, 카페, 식료품 상점, 가드닝 숍이 있다.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에 이런 근사한 곳이 있으니 굳이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간 도서관 못지않게 자주 드나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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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모든 게 자유롭다. 방문객들은 별다른 제재 없이 꽃이나 나무 열매를 바로 따 먹을 수 있다. 피크닉도 허용된다. 판매하는 음식은 모두 직접 키운 유기농 재료만을 사용한다. 비록 눈이 번쩍 뜨이는 맛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 좋다. 다양한 자연의 정취와 그림 같은 풍경, 동화 같은 장면이 어김없이 나의 프레임에 담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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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위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다. 갖가지 화훼 도구와 독특한 향을 뽐내는 허브, 수십 종의 꽃과 씨앗이 있다. 하나씩 만지고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었을 때의 기쁨처럼 이곳을 열렬히 좋아할 사람들의 얼굴이 동동 떠오른다. 나보다 더한 감탄을 쏟아낼 모습을 상상하니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몽땅 선물하고픈 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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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진 데스까?"
식당 한쪽에서 골똘히 파이를 쌓고 있던 내게 난데없이 일본인이냐고 묻는 사람이 두 명이나 다가왔다. (사진 속 아저씨는 그중 한 명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시기 전에 얼른 촬영했다) 심지어 영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말이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한국인이라고 답했다. 그들 모두 조금은 머쓱해했지만 여전히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곤 자리로 돌아갔다. 왜 오늘만 무려 두 명이었을까. 설마 이 리넨 셔츠 때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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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향한 스웨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 있다. 스웨덴 물건이 가득한 상점 한쪽에 일본(Japansk) 물건이 있는 경우도 더러 봤다. 같은 섬나라여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애정이 사실인가 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두 나라가 조금은 닮은 면이 있다. 수줍은 듯 무표정한 사람들이 많은데, 말을 거는 순간 한없이 친절해지는 점. 가면과 안전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여정을 이어가는 동안 종종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조심스러운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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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소 신기하고 특별한 하루를 보낸 후 슬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초록을 거머쥔 귀갓길. 15분 남짓의 거리를 빙 둘러 한 시간여 만에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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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머지않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당분간 모두 생각이 나겠지, 얼마나 그리울까.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책임지기 어려운 감정의 부피를 만들고 가는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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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색깔, 넘실거리는 소리, 팽창하는 냄새, 스며드는 감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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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쥔 모든 것을 이제 천천히 내려놓을 시간이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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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4일 목요일
스톡홀름으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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