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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ident (Feat. Scott Moore)
- Goldmu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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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 스톡홀름에 온 지 이 주 만에 내리는 비다.
그동안 매일 파란 하늘을 만났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청함, 끈적임도 움츠림도 없는 날씨. 선선한 바람까지 부니 이게 바로 북유럽의 여름이구나 싶었다.
이 도시와 계절이 주는 청명한 유혹을 이기지 못해 매일 쉬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점점 힘에 부친 걸까. 오늘은 이 비가 새삼 무척 반갑다. 심지어 나무로 만든 집에서 듣는 빗방울 소리는 둔탁하지만 리듬감이 있다.
그래, 오늘은 집 밖을 나가지 말자. 하루쯤은 늘어져도 괜찮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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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은 나의 어린 시절 부루마블 게임 속 가장 선망의 도시였다. 주사위를 굴려 도착한 도시에서 무슨 건물을 올릴지 고민하는 시간은 그 시절 어떤 고민보다 사뭇 진지했다.
스톡홀름은 항상 적은 투자로 가장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단 이 도시를 얻기만 하면 게임의 승패와 상관없이 승리한 기분이 들었다. 열 도시가 부럽지 않은 기분으로.
그만큼 모두가 탐을 냈지만 번번이 닿기 어려운 곳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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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스톡홀름을 차지한 적이 거의 없었다. 슬프게도 주사위는 내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단념하는 법을 알아가던 어린 시절은 이제 흐린 추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손안에 쥐고 있던 주사위 두 알을 향한 신중한 마음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는 보드판 위를 벗어나 매일 인생의 주사위를 굴리고 있다. 그 놀이 속에서 이 도시의 해묵은 갈증을 해소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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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날아가는 생각을 메모로 정리하고, 날마다 스치는 관심은 사진으로 남긴다. 눈길을 끄는 타이포그래피나 심볼을 담는 일도 그중 하나다. 대체로 단조롭고 직관적이지만 더러 은유적인 표현의 재미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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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건물을 골똘히 살핀다. 외벽의 다채로운 색 조합을 감상하고 창과 문의 형태, 안으로 펼쳐질 구조를 상상한다.
사실 들여다보면 여느 유럽의 건물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미묘한 차이를 하나 꼽자면 어떤 효율성 같은 것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원형 복도를 따라 다소 힘겹게 오르는 비스듬한 창, 선과 면이 끝나는 지점에 부채꼴 모양으로 자리 잡은 발코니 등이 그렇다. 비어 있어도 될 자리가 채워진 느낌이다. 편의 속에 편의를 더한 느낌이랄까. 역시 이케아의 나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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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앤틱상점만큼 반가운 것이 없다. 자연스레 발길이 안으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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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히 진열된 수많은 유리 제품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투명한 것들 사이로 나지막하게 웅크린 검은 잔이다. 분명 검은 색인데 검지 않다. 유리가 주는 물성 덕분인지 제 색보다 영롱히 빛나고 있다. 정말이지 유리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동글동글한 잔의 스템은 알알이 모인 검은콩을 떠올린다. 가만히 쥐어보니 손에 착 감기는 것이 무척이나 귀엽다. 나란히 정다운 검은 동그라미를 만지며 한창 고민할 무렵이었다. 멀리서 주인 할아버지가 다가오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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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금 스웨덴 남동부의 한 공방에서 온 오래된 유리잔을 보고 있어. 스웨덴의 유리 제품은 아주 전통적이고 유명해. 이건 1930년대에 만들어진 근사한 친구지."
이야기가 깃든 사물에는 힘이 있다. 오래된 물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리잔이 품어 왔을 과묵한 시간의 힘이 느껴졌다. 그 단단함에 나의 고민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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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에 성수동을 닮은 동네가 있다고 해서 찾았다.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쇠데말름(Södermalm) 지구이다. 한때는 빈민가였지만 지금은 패션, 디자인, 회화 등 예술과 문화로 가장 활발한 곳이 되어 이 도시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여기만의 속도와 리듬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을까. 과연 성수동과 비슷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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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오가는 사람이 많다. 온통 크고 높은 것들 사이에서 나지막이 자리한 나의 시선도 덩달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사람, 골목, 공간 구석구석을 천천히 살폈다. 중심가를 오가며 느끼던 간결한 기품보다 전반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로 다가온다. 저마다의 생활 방식이 자유롭고 풍성했다. 적당히 잘 다듬어진 솔직함 같달까.
나는 그 길 어딘가에서 엉터리 체스를 두는 두 남자를 보았고, 마음에 드는 빵집 앞에선 코를 킁킁거렸으며, 간판도 없는 스튜디오를 연신 기웃거렸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돌길 사이에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가장 강한 기지개를 켜는 잡초를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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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느낀바, 성수동과는 달랐다. 이색적인 분위기를 따라 많은 사람이 몰린다는 점은 닮았지만 분명 차이가 있었다. 연남동과 합정동을 잠깐 떠올렸지만 그조차 명쾌한 결론은 아니었다. 답을 모르는 질문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한국의 동네와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는 그냥 스톡홀름인 것을.
슬쩍 눈을 흘기며 슬그머니 집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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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 찾은 스톡홀름 국립 도서관.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낮은 조도, 목재의 짙은 색,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냄새 한 움큼. 고개를 돌리면 넘실거리는 초록의 싱그러움. 몸도 생각도 단순하게 머물기 좋다. 때로는 깊이 빠져들 수도 있다. 파이를 쌓아 올리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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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스터말름 (Östermalm)의 골목을 굽이굽이 돌며 상점을 다니던 날이었다. 어디선가 환호 소리가 들린다. 젊잖은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눈이 말똥해져 소리의 방향을 찾아 따라가 보았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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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내가 스톡홀름 시민들의 축제 한복판에 있다니!
아마도 한 해 중 가장 날씨가 좋은 이때를 기다린 행사가 아닐까 싶었다. 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도로를 통제하고 편의 시설을 제공하며 시민 모두가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그 열렬한 분위기에 나의 두 손도 수줍은 물개 박수로 화답했다. 땀 흘리는 사람도, 응원하는 사람도 모두 근사했다. 먼 나라에 와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실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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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순간을 꽉 붙들고 싶은 곡을 만날 때가 있다.
듣고 있으면 갑자기 주위를 감도는 공기가 달라지는 기분. 세상이 특별해지는 마법에 빠진 것 같은 순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처럼 세상을 보며 그 놀라운 순간을 이해한다는 듯 함께 미소 짓는 것.
며칠 전, 한 문구 상점에서 그런 음악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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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곤증이 밀려와 세모난 눈으로 느릿느릿 물건을 구경할 때였다. 스피커 너머로 서정적인 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단독 기타로 채워진 멜로디였다. 평소 좋아하는 풍의 노래라 반가웠다. 늘어진 세모눈은 금세 동그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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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순간은 대체로 도입부부터 찾아오는 법. 절제된 음색의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귓가에 정직하게 꽂히는 것이 부드럽지는 않지만 섬세했다. 꼭 자신의 이야기를 읊는 듯 덤덤하고 편안했다. 짙은 호소력마저 느껴져 코끝이 조금 아릿해졌다. 나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언어가 구불구불하게 들리는 것이 분명 스웨덴 음악 같은데..'
시리를 불러서 곡을 찾아야 하나. 눈알을 도르르 굴리며 생각했다. 그러기엔 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마법에 걸려 목석이 된 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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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주인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만큼 동그란 눈으로 이 흥미로운 순간을 지켜보고 계셨다.
이윽고 아주머니는 멋쩍게 서 있는 나를 향해 천천히 미소를 보였다. 쓰고 있는 안경이 눈썹에 닿을 만큼 힘껏, 점점 더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 비로소 곡의 제목을 알 수 있었다. 짧았던 마법이 다정하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오늘, 이 상점을 오지 않았더라면 이생에 결코 만날 수 없을 노래였겠지. 아주머니의 선량한 눈빛과 다정함도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꼭 붙들어 맨 시간 뒤로 어김없이 저녁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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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에서 들은 바로 그 음악, Dian Fossey - Säke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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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책은 언제나 유르고든 섬의 숲 한가운데를 빙 돌며 끝이 난다. 자연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날이 없다. 오늘도 마지막 일과를 풍요롭게 마무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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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이 섬과 도시에 조금씩 적응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북구의 여름 하늘은 때때로 이렇다. 순식간에 하늘의 표정이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급한 여행자에서 호젓한 생활자가 된 이제는 알고 있다. 이렇게 변덕스러운 구름을 만나는 날은 당황하지 않고 실내로 넘어가 여유로운 탐구 생활을 이어가면 된다는 것을. 더는 입국 첫 날처럼 시무룩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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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을 즐기기 좋은 스톡홀름에서 이런 날씨에 갈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하다. 도시를 대표하는 유명 박물관과 차림새 좋은 미술관 등.. 하지만 나는 그중 가장 덜 알려진 곳을 선택했다.
스웨덴 왕자가 살던 집과 정원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 된, 'Prins Eugens Waldemarsudde'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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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저택이 미술관이라니...!
그림 구경만큼 집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달콤한 위안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유르고든 섬이 품고 있는 미술관이어서 제일 먼저 가야만 했다. (어느 누구 하나 부추기지 않는, 이 섬을 향한 지독한 짝사랑이 계속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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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된 왕자의 작업실로 들어섰다.
스웨덴 왕자 에우옌(Prins Eugen, 1865-1947)은 회화,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예술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치보다는 늘 예술에 관심을 두어 왕실 안팎으로 질타를 받았고, 결국 왕가의 삶과는 거리를 두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이후 정식 화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작품 수집을 통해 다른 화가들을 후원했다.
에우옌 왕자의 다양한 면모를 느꼈다. 흔한 왕자의 길로 가지 않은 입체적인 모습과 굽히지 않은 중심의 길 그대로 나아가는 평면적 모습까지. 한 인물을 생각하며 저택 안의 차분한 공기를 느꼈다. 그 속엔 저마다의 서사가 담겨 있었다. 귀족적이고 화려한 인테리어 사이로 늙어가는 가구와 장식, 오래된 작품에 얽힌 고요한 세계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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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장식과 요소도 남김없이 보았다.
꼭 오래된 것들 사이에 숨겨둔 이야기처럼 조용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것들을 찾고 살피는 건 본책만큼 특별한 별책부록 같은 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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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색조와 톡톡한 붓의 터치가 느껴지는 유진 왕자의 그림 네 점을 오래 바라보았다. 불안하지만 찬란했을 그의 삶이 한 편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왕자로서의 역할보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온전히 사랑했던 주체적인 모습이, 이 여정 한복판에서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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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마음 안에 피고 지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연습이 필요하겠다. 지나 보면 별거 아닌 일도 무겁게 들고 있던 일이 있었으니까.
무거운 성찰 앞에 괜히 마음이 서성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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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핀란드 헬싱키로 잠시 넘어왔다.
지금 이곳에서의 둘째 날 밤을 맞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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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9일 목요일
스톡홀름, 그리고 헬싱키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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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멀리 떨어져 지내며 다양한 모양의 사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저히 혼자서만 간직하기엔 아쉬운, 다정한 그림 세 점을 페이퍼 파이 구독자분들께 나눕니다.
좋은 그림은 깨끗한 거울처럼 마음을 맑게 비추는 것 같아요.
매일의 산책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림 그려주신 수혜 님, 은이 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이 편지를 보시는 모두, 오늘도 고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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