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 없이 팔랑팔랑 집을 나섰다. 바삭한 햇살에 묵은 피로가 녹아내린다. 다정하고 익숙한 것이 건네주는 하루가 반갑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입안까지 개운하다. 포크에 공기를 휘감은 맛이랄까.
다시 스톡홀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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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하늘 위, 새하얀 뭉게구름. 입체적인 풍경이 손에 닿을 듯 선명히 다가온다. 3D 동화책 한 권을 펼친 기분이다.
자연스레 느려지는 나의 걸음 사이로 스웨덴 할머니가 쓱 지나간다. 순간 내 앞을 스치는 할머니의 백발이 흰 구름인줄 알고 깜짝 놀랐다. 정말이지 하늘 위로 함께 피어오르는 줄만 알았다. 머쓱함을 느낄 새도 없이 할머니는 내게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이럴 시간이 없다. 냉큼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실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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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긋거리는 귀, 바짝 올라간 꼬리로 말을 건네는 무구한 생명체들. 괜시리 반가운 마음에 우두커니 서서 아이들을 바라본다. 단춧구멍을 닮은 작고 검은 눈으로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하지만 온 세상이 견주 하나인 듯 이내 다시 방향을 튼다. 이윽고 견주가 앞장서자 조그마한 네 발로 열심히 뒤를 따른다.
영특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 오늘도 조건 없는 순한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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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어김없이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햇살이 드는 잔디밭에 앉아 유유자적 시간을 보낸다. 각자 혹은 함께하는 여유가 묻어난다. 무리하지 않는 삶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다. 적정한 시간만을 노동하고 모두 함께 멈추는 것. 그 속도가 조금 느려질지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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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우렁찬 갈매기의 울음, 작은 새의 지저귐, 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대화. 나를 둘러싼 모든 소리에 귀를 열어본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도 계속 긴 산책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마음이 되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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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머릿속 스톡홀름 지도가 생겼다. 그 위에 기억이 새겨지고 겹겹이 쌓여 가는 과정을 즐기고 있다. 마치 페이퍼 파이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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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편안함을 추구하는 나를 발견한다. 익숙한 골목을 따라 걷고, 기억에 남는 맛을 떠올리며 같은 메뉴를 시킨다. 감각이 이끄는 가장 큰 안정감을 찾아 일상을 보낸다. 그 행동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단연 도서관이다. 침대에 누워 내일을 그려볼 때 어김없이 도서관을 떠올린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계속 이끄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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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파이(paper pie)를 매개로 느슨하지만 반복적인 일상을 만들고 있다. 편안함을 찾는 것은 어쩌면 이 도시와 유대감을 쌓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그 밀접한 기분을 가장 빠르고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나에게는 도서관이다.
보통 산책길에 나서면 얕은 물 속을 '유영'하듯 도시에 천천히 스며든다. 그러다 도서관에 다다르면 순식간에 풍덩 빠져들고 만다. 마치 물밑 깊은 곳을 '잠수'하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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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참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뭇잎의 색이 바뀌고 하늘의 색은 깊어져 간다. 언젠가 스톡홀름을 다시 떠올린다면, 가장 그리워할 시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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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이십 분 기차를 기다린다. 그토록 궁금하던 미지의 나라, 덴마크 코펜하겐에 가는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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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부르지만 모두 다 비슷한 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각각의 나라가 어떤 풍경을 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코펜하겐이라는 도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반겨줄까, 날씨가 이대로 쭉 좋아야 할 텐데. 그나저나 바깥 풍경이 참 예쁘네.
창밖을 보는 내내 상념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덕분에 네 시간이 훌쩍 넘는 이동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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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풍경이든 겨울의 설경이든 아름다운 풍경은 꼭 사람의 생각으로 끝이 난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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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코펜하겐 중앙역에 도착했다. 발을 딛자마자 보이는 바닥의 타일 색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다. 벌써 좋은 예감이 드는군. 오랜 세월 매만진 돌멩이처럼 나의 호기심 주머니는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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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건대, 코펜하겐 여행 준비 과정은 사실 쉽지 않았다. 북유럽의 여름(매해 6월~8월)이 성수기인 탓에 예산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머무를 곳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턱 없이 높은 물가에 일정도 여러 번 조정했다.
그렇게 힘겹게 준비를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오래전 메모장에 담아둔 한 구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내 마음의 거울 같은 글이 하나 있었지! 이 문장 이상으로 나의 감정을 잘 표현한 글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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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 산책' 中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물며 앞으로 또다시 여행의 벽에 부딪히면 어김없이 이 구절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같은 위안를 얻고 계속 이어갈 수 밖에. 여행은 계속되어야 하고, 결국은 그런 것들이 또 우리를 살게 할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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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나를 살게 할 작은 집을 구했다. 집주인의 손길이 가득한, 이름도 낯선 뇌레브로(Nørrebro)라는 동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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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레브로(Nørrebro)는 스톡홀름의 쇠데르말름처럼, 이주민이 모여 살던 허름한 동네가 정부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바뀐 동네다. 지금은 유행을 따르는 학생이나 예술계 종사자들이 모여 있다. 2021년에는 한 글로벌 매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관광지의 느낌보다는 어느 은밀한 뒷골목을 떠올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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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있는 색채의 아프리카 상점이 있고, 영국, 이탈리아의 숨은 물건을 쏙쏙 골라 판매하는 빈티지숍이 있다. 반지하 가득 액자가 쌓인 가게와 청량한 파스텔 색조의 분위기로 가꾼 식료품 상점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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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울창한 나무숲이 우거진 아시스텐스 묘지(Assistens Kirkegård)가 있다. 동화 작가 안데르센을 포함한 덴마크의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나는 낯선 풍경의 묘지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형태의 묘와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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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묘지 앞에 들어선 순간, 지도를 재차 확인해야 했다. 예상한 풍경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파리 시내에 조성된 아담한 묘지도, 베를린의 추모 공원인 홀로코스트도, 언제나 내가 아는 묘지의 색채는 차분한 회색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은 온통 녹색의 싱그러움과 생기로 가득했다. 완전한 공원에 가까웠다. 심지어 하늘 높이 솟은 긴 나무 터널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그림 같은 풍경마저 닮아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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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묘지는 마냥 무겁거나, 유령이 나오는 등의 무서운 시설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쉼터이고, 산책길을 벗 삼아 쉴 수 있는 놀이터였다. 산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곳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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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묘지 가까이에 있어 의심의 싹부터 틔웠던 나를 돌아보며, 묘지를 단순히 어두운 대상으로만 생각했다는 사실을 겸허히 환기시켰다. 잊지 말아야지, 삶과 죽음은 동그랗게 이어진 하나의 굴레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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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동경해온 덴마크 브랜드, 프라마(Frama)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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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마(Frama)는 가구, 조명, 의류, 향수 등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걸친 물건을 만드는 브랜드이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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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디자인 그룹이라고 불릴 만큼 그 규모가 커졌는데,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미감과 옛것과 새것을 구분 짓지 않는 전개 방식을 개인적으로 오래 좋아해 왔다. 상상력과 실용성을 잇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브랜드 같달까. 기대감으로 힘이 퐁퐁 솟는다. 카메라 배터리의 밥을 가득 채우고 여유로운 시간대에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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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 '코펜하겐 디자인 위크'가 열리는데 프라마도 그 시기에 맞춰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아쉽게도 나는 기간이 지나 찾았는데, 운 좋게도 남겨둔 전시의 일부를 만날 수 있었다. 'Structure’s of Living' 이라는 주제로,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인테리어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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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리되었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진 부엌과 화장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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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진 스틸 소재만으로 구획을 나누어, 새로운 구조(Structure)에서의 생활(Living)을 연출했다. 다소 실험적이고 기능적인 모듈식 형태다. 멀찍이 서보고, 가까이도 다가가 본다. 처음은 어리둥절했지만, 흐름을 이해하자 수긍이 간다. 마냥 신기해 한참을 구경했다.
군데군데 연출된 소품에도 눈이 머문다. 대부분 새롭게 출시한 그들의 컬렉션이었다. 세상은 어쩜 이렇게 멋진 것 투성일까. 잘 둘러보고 있냐는 직원의 눈짓에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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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 약국이었던 건물을 고스란히 보존한 프라마의 쇼룸은 사진 속 색 바랜 나무 가구장이 그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아마도 연한 나무색으로 태어나 나이를 먹어가며 어둡게 익어가는 중일테지. 이 고전적이고 근사한 틀에 현대적인 감도로 채워진 프라마의 제품(향수, 로션, 초 등)은 문득 브랜드를 이루는 작은 요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라보 프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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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으면 두 다리도 덩달아 씩씩해진다. 길을 거닐며 만나는 풍경. 호수 위로 비치는 물그림자와 윤슬. 본격적으로 이 도시 탐구에 나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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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0일 목요일
코펜하겐으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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